3번째> 서베를린은 섬이었다.

  • 작성자: 총괄관리자
  • 작성일: 2023.06.18. 12:00
  • 조회수: 88

<베를린은 섬이었다> 민화협 독일 베를린지회 온대야 (on 대화 ja!) 시리즈 

“독일 분단 시절 동독안의 섬이었던 서베를린에서 경험한 생생한 비하인드 스토리”

 

민화협 독일 베를린지회(상임의장 정선경, 이하 베를린 지회)는 지난 3월 31일 온라인 강연을 시작으로 6월 16일 <서베를린은 섬이었다>라는 제목으로 온대야(on 대화 ja, ‘ja’는 ‘yes’를 의미)의 두 번째 온라인 세미나를 열었다.

이번 온라인 세미나에는 파독 간호사 출신이자 민화협 독일 베를린지회 회원, 민주평통 자문위원, 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 베를린지회장, 코리아협의회 평화의 소녀상 지킴이, 한민족유럽연대 회원(전 의장) 등으로 활동하는 최영숙씨가 온라인 강연의 강사로 나섰다. 최씨는 2021년에는 민주화운동을 통한 국가사회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서베를린은 섬이었다>라는 특이한 제목의 이 강연은 이미 시작전부터 우리나라와 비슷한 과거 역사를 가진 독일의 경험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대해 고민하고 배우려는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모았다. 서베를린은 지리적으로는 섬이 아니라 유럽의 중심에 놓여있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동독의 안에 놓여있는 섬이었기 때문이다. 

최영숙씨는 온라인 강연을 통해 독일 분단 시절 서베를린에서 거주하며 경험한 생생한 이야기를 전했다. 특히 당시 분단국가의 분단 도시였던 베를린에서 서독으로의 여행이나 서베를린 봉쇄 및 공수작전 등에 관한 설명은 당시를 경험하지 못한 이들과 젊은이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지리적으로 경기도 안에 서울이 놓여있는 것처럼 동서독 분단시절 베를린은 동독 안쪽에 위치하고 있었고 이마저도 동서베를린으로 반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작은 서 베를린만 동독 안에 있는 셈이어서 당시 소련은 서베를린마저도 동독에 편입되기를 바랬었다고 한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서베를린을 봉쇄였던 것이었다.

서베를린으로 이어지는 전기 송선이나 도로, 철도, 수로 등을 모두 봉쇄하다보니 서베를린에는 생필품 공급은 물론 나중엔 상수도마저 공급이 끊기는 사태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에 미군의 주도로 연합군이 비행기에 식량과 석탄 등 생필품을 실어 날랐는데 공수작전이 처음 시작될 때는 갑자기 날아오는 비행기들에 놀란 나머지 서베를린 시민들은 공격으로 오인하여 공포에 힙싸이기도 했으나 이내 알아차리고 환호했다고 한다. 연합군의 엄청난 물량공세는 베를린 시민들이 생활을 하고도 남아 비축할 정도였고  공수 물자도 초기엔 필수품이었으나 몇몇조종사들이 가져간 초콜렛 등을 손수건에 싸서 떨어 트리고 나중에는 담배, 커피 기호품까지 수송하여 낙하산으로 떨어뜨렸다고한다. 특히 게일 해버슨이라는  조종사는 한개의 껌을 여러 사람이 종이 냄새까지 맡으며 나누어 먹는 모습을 보고 사비를 털어 사탕과 초콜릿 등을 구입해서 떨어뜨려줬는데 아이들은 이것을 사탕폭격기 candy Bomber 라고 불렀다고 한다.

베를린 공수작전은 서방에서 서베를린으로 물자를 수송하는것에 그치지 않고 서베를린에서 생산된 공산품수출을 위해 서방으로 실어 날으기도 했다. 서베를린과 서독간 승객도 수송했기도 했었으나 비용면에서 항상 비행기만을 탈 수가 없었으니 베를린사람들은 베를린에서 서독에 가려면 동독을 지나갈 수 밖에 없었고 동독국경을 지날 때마다 여권에 출입국도장이 찍힐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여권연장을 위해 영사관에 가면 여권에 찍힌 그 동독의 출입국도장때문에 의심의 눈초리를 감내해야했고 다시는 동독을 지나가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나서야 여권이 연장을 받을 수가 있었다고 한다. 서베를린에서 서독을 가기위해 동독을 통과할 때 15마르크의 통행세를 냈었는데 나중에 서독이 도로를 건설해주고 나서는 통행세없이 통행이 가능했다.

 

이 후 그녀는 1967년 ‘동백림 사건’을 언급하며 독일 내 한인뿐만 아니라 독일 음악가들과 프랑스 정부 그리고 서독 연방 정부의 인사들이 나서 구명 운동을 했었다고 당시 정치 상황을 전했다. 그러나 동시에 최씨는 동백림 사건이 한인 사회가 이념적으로 분열이 되는 그 시발점이 되었으며 현재까지 그 여파가 남아있는 것 같다고 했다. 서베를린에서 출발하여 서구 사회에서 일어난 68혁명(이하 68운동)을 보면서 많은 것을 보고 느꼈는데 당시 68운동은 크게 반권위주의적 시위, 반 국가폭력 그리고 반 베트남전쟁이라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으며, 68운동을 통해 여성들의 교육 신장의 필요성과 계몽활동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재독 한국여성 모임에도 큰 영향을 줬었다고 한다.

 

한반도에서와는 달리 동서독은 냉전체제에도 많은 교류가 있었다. 신청을 하면 동독의 친척들도 수시로 방문할 수 있었으며 생필품은 물론 커피 등 기호품도 수시로 보내줄 수가 었어서 최씨의 시부모님들은 동독에 친척들에게 자주 물건을 보내기도 하고 직접 방문했었다고 한다. 섬이었던 베를린의 인구유입을 위해 특혜를 주었던 것도 있었는데 예를 들면 서베를린에 정착하는 젊은이들은 징집면제가 되었으며, 서독에서 서베를린에 오면 살 집을 구할때 때까지 3개월간 머무를 집을 지원해 주기도 하고 일정한 기간동안에는 서독의 본가를 방문하는 차비도 지원해주었다고 한다. 또한 놀라웠던 것은 분단된 국가지만 동독의 TV를 볼 수 있어서 최영숙씨는 동독의 영화 등도 많이 봤었는데 한번은 89년 임수경학생이 한국 전대협 (전국대학생 햡의회)을 대표하여 평양에서 열리는 세계청년 축제에 참가 했을 때 동독티비에서 중개를 해주어 세계에서 처음으로 볼 수가 있었던 것이 놀라웠다고 한다. 이렇게 동서독은 일관성있는 동방 정책으로 교류를 해나갔던 것이 통일을 앞당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그외에도 독일통일의 과정에서의 경험, 통일된 오늘의 베를린, 베를린에서의 한국문화의 전파, 베를린평화의 소녀상 지킴이활동 등에 대해 얘기하며 강연은 예상된 시간을 훌쩍 넘겨서까지 계속되었다.

채민진 민화협 베를린지회 회원(베를린 자유대 정치학 석사과정)이 사회를 본 이날 세미나에는 독일 내 한국인 유학생들과 동포들 뿐만 아니라 뉴질랜드, 미국, 캐나다, 한국, 일본 등 세계 곳곳에서 최 씨의 강연을 듣기 위해 50여 명이 넘는 청중들이 온라인으로 참석하였다.

 

베를린지회의 다음 강연으로 9월 중순 “국경 분단 지점 사망자들의 추모와 기억 그리고 미래 세대들의 과제”를 주제로 민화협 장은영 회원(베를린훔볼트대 정치사회학 석사과정)이 연사로 나선다. 베를린 장벽 재단의 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베를린 뿐만 아니라 과거 구 동독 지역의 국경 분단 지점 피해자들 혹은 희생자들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과 방향에 대해 강연을 할 예정이다. 

 

민화협 베를린지회는 지난 6월24일 제2회 한반도평화염원 자전거투어 및 독도는 우리땅 플래시몹을 개최했다. 또한 독일 분단시절 서베를린을 둘러싸고 있던 약 160킬로미터 길이의 옛 장벽길을 걸으면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생각해보는 “베를린 장벽길을 따라 평화를 향해 걷다” 프로젝트를 작년부터 진행해오고 있다. 베를린지회 정선경 상임의장은 ‘한국에서 베를린을 방문하는 분들도 장벽길 걷기 프로젝트를 함께 하기를 희망한다’고 전했다. 아래 사이트를 통해 접속하면 장벽길 걷기 프로젝트 뿐만 아니라 다양한 민화협 관련 행사들을 접할 수 있다. (https://berlinpeacewalk.mixon.io) 

 

작성자: 장은영 민화협 베를린지회 회원

공감

0명이 공감합니다.

0 / 1,000

댓글 ( 0 )